2026.01.25 (일)

  • 흐림동두천 -7.9℃
  • 구름조금강릉 -4.2℃
  • 맑음서울 -5.7℃
  • 맑음대전 -5.4℃
  • 맑음대구 -1.0℃
  • 맑음울산 -1.0℃
  • 맑음광주 -3.3℃
  • 맑음부산 1.9℃
  • 흐림고창 -5.0℃
  • 맑음제주 3.0℃
  • 맑음강화 -8.1℃
  • 흐림보은 -6.3℃
  • 흐림금산 -3.5℃
  • 맑음강진군 -2.5℃
  • 맑음경주시 -3.9℃
  • 맑음거제 -0.6℃
기상청 제공

특별인터뷰

열 개의 눈으로 사람을 읽는 치료사

현대물리시술원 박용택 원장

 

울산시 울주군에는 온종일 붙어 다니는 금슬 좋은 부부가 살고 있다. 남편 박용택 씨는 열 살 때 백내장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은 1급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맹학교에서 익힌 안마 기술로 치료실을 열어 수많은 사람들의 몸을 돌봐왔다. 아내 오희자 씨는 늘 그의 곁을 지켜온 동반자다. 40년 전, 건강을 위해 처음 오르기 시작한 자전거는 이제 이 부부의 일상이 되었다. 앞을 볼 수 없는 박 씨는 아내의 신호에 의지해 자전거를 몰고, 두 사람은 하루 100km를 함께 달린다.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는 그 길 위에서, 부부의 시간과 신뢰는 더욱 단단해진다.

 

Q. 10살도 되기 전에 실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큰 상실을 겪으셨을 텐데, 당시 심정은 어떠셨나요?

사실 제 주변에는 성인이 된 이후 중도에 실명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실감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커서 자살 시도나 심각한 우울증으로 오랜 시간 절망 속에 머무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저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주 어린 나이에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 고통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고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 현실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시력을 필요로 하는 학습 활동이나 체육 활동은 물론, 자유로운 이동과 직업 선택에까지 많은 제약이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며 깊은 절망감과 방황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어릴 적 실명 당시의 기억도 아직 생생합니다. 햇빛을 보면 눈이 너무 부시고 시려서 바닥에 엎드린 채 손등으로 눈을 가리고, 고통을 참고 견뎌야 했던 순간들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Q. 그때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기억나십니까?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제가 늘 눈이 너무 부시고 시리고 아파서 울기만 했다는 점입니다. 그로 인해 집안 분위기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초상집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겁고 침울했습니다. 상황이 워낙 절망적이다 보니, 가족 중 한 사람은 “저 아이는 사람 노릇을 못 할 것”이라며 극단적인 말을 내뱉을 만큼, 저는 가정 안에서도 가장 큰 문제의 중심에 놓여 있던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Q.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게 됩니다. 시력을 잃은 뒤, 늘 눈을 감고 사는 기분이었을 것 같습니다. 원한 것은 아니지만 어둠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신 셈인데, 그 안에서 또 다른 ‘빛’을 발견하신 건가요?

돌이켜보면, 우리는 세상을 본다고 하지만 사실 모든 것을 다 보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여행을 다녀와도 사람마다 기억하는 장면이 다른 것처럼, 세상은 눈으로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경험과 사고, 성향을 통해 이해됩니다.

이런 경험도 있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있을 때 누군가가 달콤한 돈벌이 제안을 해온 적이 있습니다. 설명을 듣는 순간 저는 ‘이건 사기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분명했죠. 하지만 아내는 달리 판단했고, 결국 피해를 보게 됐습니다. 그 일을 통해 저는 인생에서 눈으로 보는 것보다 사고력과 판단력으로 읽어내야 할 일이 훨씬 많고, 때로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물론 저는 빛을 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상에서는 아내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잘하는 것이 있고, 부족한 것이 있지요. 저는 보지 못하는 부분에서 ‘눈 밝은 사람’의 도움을 받을 뿐입니다. 그래서 제 시각장애를 특별한 불행으로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 속에서 감사함을 배우고, 관계가 깊어지는 순간들을 자주 경험합니다. 어쩌면 제 부족함이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고, 또 다른 빛을 발견하게 해준 계기였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Q. 지금 이렇게 근사한 치료실에서 물리치료를 하고 계신데요. 물리치료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요즘 ‘복지’라는 말이 많이 쓰이지만, 서구 사회에서 복지의 출발점은 장애인을 ‘무능한 존재’로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은 시각에 제한이 있을 뿐, 다른 신체 기능은 정상인 만큼 그것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을 찾자는 개념이죠. 그런 맥락에서 한국 사회에서 시각장애인에게 비교적 잘 맞는 직업 중 하나가 안마·지압·물리치료 분야입니다.

시각장애인은 눈 대신 손을 많이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사진이나 그림처럼 시각이 절대적인 영역은 한계가 있지만, 근육의 긴장이나 굳음처럼 미세한 변화는 촉각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시각에 의존하지 않다 보니 손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발달하게 됩니다.

저 역시 손끝의 감각으로 근육과 관절의 상태를 비교적 정확하게 느끼는 편입니다. 그래서 환자분들이 “원장님은 아픈 곳을 정확히 알고 풀어준다”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그래서 이런 농담도 자주 합니다. “눈 있는 사람은 두 개의 눈으로 보지만, 눈 없는 사람은 열 개의 눈으로 봅니다. 제 손가락 하나하나가 다 눈이거든요.” 이 감각 덕분에 별도의 광고 없이도 환자들의 소개로 치료실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시작했지만, 치료를 받고 좋아진 분들이 또 다른 환자를 데려오며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45년째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사라졌어야 할지도 모를 치료실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제게는 하나의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Q. 이 일을 혼자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곁을 지켜준 든든한 동반자, 아내 오희자 씨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저는 열한 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결혼할 당시에도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아내 역시 같은 교회의 교인이었지만, 직접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거의 없었죠. 당시 아내는 결혼에 큰 뜻이 없었고, 인생을 다소 허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래도 인생을 조금은 가치 있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그 무렵 지팡이를 짚고 교회를 찾아오는 제 모습을 보게 됐다고 하더군요. “저 사람 곁에서 손만 잡아줘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생겼지만, 선뜻 다가가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이후 교회 구역을 맡고 있던 집사님을 통해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그렇게 만남이 이어졌습니다. 처음 만나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며 겪는 어려움과, 함께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제 바람을 솔직하게 나눴습니다. 그 대화를 통해 아내는 ‘이 사람의 곁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분명해졌다고 합니다. 3월에 처음 만나 대화를 시작했고, 그해 7월 29일에 결혼했으니 불과 네다섯 달 만의 결정이었습니다.

 

Q. 우리 삶을 밝게 해주는 ‘빛’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막연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오랜 사유와 통찰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어릴 때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흔히 “눈이 900냥”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인생의 거의 전부를 잃는 것과 같다고 여겼습니다. 실제로 성장기에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 보였고,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에 깊은 절망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시력이 있고 신체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자주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리한 선택으로 빚에 시달리다 인생의 궁지에 몰리거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으며 무너지는 모습들 말입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이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인생을 잘 살아가는 것은 아니구나.’ 시력은 분명 중요한 조건이지만, 인생의 99%를 결정하는 요소는 아니라는 깨달음이 점점 분명해졌습니다. 우리가 자주 떠올리는 헬렌 켈러 역시 그렇습니다.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었지만, 남아 있는 감각과 사고력을 극대화해 신학과 철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해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베토벤도 청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에서 교향곡 9번이라는 불후의 작품을 남겼지요.

이런 사례들을 보며 저는 제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됐습니다. 저는 시력은 없지만 청각과 촉각, 그리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기능이 남아 있습니다. 이 자산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시력이 꼭 필요한 일을 제외하고도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빛’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빛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조건을 이해하고 삶의 방향을 설계하는 힘입니다. 시력이 없어도 주체적으로 삶을 만들어간다면, 그 사람은 이미 충분히 빛을 보고 있다고 믿습니다.

Q. 시각장애를 가진 삶을 통해 배운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무엇인가요?

시각장애를 갖고 산 지도 벌써 수십 년이 됐습니다. 처음 장애를 입었을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면 사회의 환경과 기술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습니다. 예전에는 점자를 찍은 두꺼운 종이에 의존해야 했지만, 지금은 컴퓨터와 인터넷, 다양한 보조기술 덕분에 정보 접근이 훨씬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들은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 ‘도움’이 불편하고 피곤하게 느껴졌습니다.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인간은 원래 혼자 완벽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약함을 가지고 있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살아가도록 존재합니다. 시각장애가 있든 없든, 결국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 관계는 사람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도움을 주고받은 사이가 원수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관계는 인생을 지탱해 주는 중요한 힘이 됩니다. 시각장애를 갖고 살아오며 저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약함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며, 저는 세상에 여전히 따뜻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자주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시각장애라는 조건이 불편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하나의 통로였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아내 오희자 씨의 한마디가 기자를 놀라게 했다. 계좌송금이나 인터넷 쇼핑몰 구매 같은 일상적인 디지털 업무를 지금까지 박용택 원장이 도맡아 해왔다는 것이었다. 집 안의 기계가 고장 나도 그의 손을 거치면 말끔히 수리된다고 했다. 박용택 원장의 삶은 ‘보이지 않음’이 곧 어둠이라는 통념에 질문을 던진다. 그는 시력을 잃었지만, 사고력과 촉각, 관계와 감사의 힘으로 삶을 다시 조립해 왔다. 누군가의 도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배웠다. ‘보지 못하는 삶’은 그에게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비추는 또 하나의 빛이 되었다.